새끼줄과 가마니
새끼줄을 꼬아 집으로 가져왔더니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이거 정말 니가 꼰 거니?" 새끼줄을 보고 놀란 아버지는 칭찬보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곧 아들의 손을 살펴보더니 "또 새끼줄 꼬면 안 된다."라고 꾸짖듯 한마디 하셨습니다.
어른의 손도 처음 새끼줄을 꼬면 곧 손에 물집이 잡힙니다. 그걸 어린 녀석이 해냈으니 손이 멀쩡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손 아픈 것은 어린 나에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더 앞섰으니까요.
나의 인생 첫 기술 공예 작품은 드디어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들 조금 있으면 가마니도 짜 오겠는 걸?"
농촌에서 새끼줄의 용도는 매우 다양해, 집집의 광에는 일정 분량 이상의 새끼줄이 항상 똬리를 틀고 앉아 쓰임을 기다렸습니다. 가을에 만들어진 새끼줄은 봄이 되면 마당으로 나오는데, 그때 새끼줄의 중요한 용도는 가래를 묶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은 가래질이 뭔가 하시겠지만, 제가 아이였던 1970년대까지도 모내기 전 농촌 들녘은 온통 가래질 천지였습니다.
오늘은 박 씨네 논, 내일은 김 씨네 논, 그리고 우리 논까지 농번기가 되면 거의 매일 "어여차, 어여차" 가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래질은 세 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데, 여기서 새끼줄은 가래를 당기는 데 사용됩니다. 또 뒷간의 배변 처리에도 새끼줄을 사용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가을에 만들어진 새끼줄은 다음 해 여름까지 사용되는데, 정말 대단한 것을 묶기도 합니다. 바로 지붕이죠. 그 당시 대부분의 농가는 초가지붕이었는데, 이 초가지붕은 이 년마다 짚단을 교체합니다. 그리고 새로 덮힌 짚단에 새끼줄을 두르고 지붕 전체를 묶습니다.
그외에도 아들을 난 집은 붉은 고추와 숯 등을 끼워 넣은 새끼줄을 문간에 걸쳐 놓고 '금줄'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무당이 굿을 할 때도, 장례를 치를 때도 기타 마을 행사에서 돼지를 잡을 때도 새끼줄은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니 여섯 살배기 아이도 새끼줄을 꼬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 새끼줄 꼬기의 마지막 단계는 가마니와 멍석 짜기입니다.
그 당시 농촌에서 가마니와 멍석은 토착 문화의 기저를 엮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마당에 멍석이 펴지고 가마니에 쌀이 담기는 순간 세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 해 갚지 못했던 신세를 떠올리기도 하고, 날카로운 이해 관계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그때는 송아지를 구매했어도 금방 가져오지 않고 집 사정을 봐가며 나중에 가져오는 일도 흔했습니다.
“여보! 여름에 맡겨 놓은 송아지 어떻게 찾아오지요?”
“쌀섬이나 주고 데려오도록 합시다.”
어떤 집은 장리쌀을 갚기도 하고, 또 어떤 집은 장리쌀을 얻어오기도 하며, 또 다른 이는 장리쌀 놓을 자리를 알아봅니다. 마을에는 도시물을 먹은 새로운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여름 내 닫혀 있던 투전판도 다시 열립니다. 그들 낮선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들 무렵이면 명절을 준비하며 한 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이죠.
여섯 살배기의 손에도 그새 파닥한 힘줄이 그려졌습니다. 그때의 시골 가마니에는 농촌 마을의 정과 굴곡이 담겼지만, 북두문학에서는 글을 담고 있습니다. '글가마'는 그렇게 시작된 제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