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인을 향한 차별적 시선… 한국 언론의 민낯이자,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작성: 이준엽 | 게시: 2025년 5월 31일

한 언론사의 망신 보도가 또 불거졌다. "중국서 귀화한 남성, 사전투표 영상 찍어 中 SNS 올렸다가 '덜미'"라는 제목으로, 한 남성이 사전투표소에서 자신의 투표 장면을 촬영해 중국 플랫폼 '도우인(抖音)'에 게시한 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가 '중국에서 귀화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기사에 굳이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마치 '중국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내포한 듯한 보도 태도는 충격적이다.

이 보도를 낸 언론은 다름 아닌 유력 경제신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 신문이다. 하지만 이번 보도는 그 오랜 전통과 명예를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는다. 단순한 실수로 치부할 수 없다. 이번 기사는 최소한의 인권 소양도 갖추지 못한, 날 것 그대로의 말초적 감수성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삐딱한 사고 방식이 편집부를 거치면서도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내부에 인종·국적에 따른 편견이 깊숙이 침윤해 있다는 증거다. 만약 그가 미국 백인 출신의 귀화 신분이었다면, 과연 출신 국가를 언급했을까?

기사가 '중국 귀화인'이라는 정체성을 콕 집어낸 행위는, 사실의 나열을 기회로 삼은 지상 최대의 저질 프로필 차별이다. 이는 명백한 외국인 혐오이고, 귀화인을 향한 냉소와 낙인을 강화하는 사회적 시그널로 작용한다.

증오와 차별을 의미하는 손가락질 이미지

이것은 또한 인종차별과 남녀 갈등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보수 정치의 책임이기도 하다. 수년 전부터 '외국인 혐오'나 '젠더 갈등'은 일부 정치 세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산적으로 증폭되어 왔다. 소외와 혐오를 동원해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저열한 전략은, 결국 언론 보도마저 오염시키기에 이르렀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의 태도는, 이제 조회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치 않는 언론의 행태로 이어진 것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감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2021년 있었던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다. 당시 총격범은 아시아계 여성들을 겨냥했고, 미국 주류 언론과 당국은 ‘범인의 개인적 성적 분노’로 사건을 축소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명백한 아시아 혐오 범죄였으며, 그 기저에는 언론과 사회가 아시아계를 ‘외부자’로 묘사해온 오랜 관행이 있었다. 이는 결국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생명과 인권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예는 프랑스의 무슬림 여성 차별 보도다. 프랑스 일부 매체들은 특정 사건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잡 착용 여부를 기사 제목에 굳이 명시함으로써, '이슬람 문화=문제'라는 편견을 조장해왔다. 이는 실제로 무슬림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모욕당하거나, 고용 시장에서 차별을 당하는 현실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우리 사회도 더 이상 다르지 않다. 이제 한국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이 함께 살아가는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2024년 기준, 귀화자와 이민자 가정 출신 인구는 100만 명을 넘겼다. 그들도 세금을 내고, 의무를 이행하며,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여전히 그들을 ‘이방인’으로 묘사하며,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출신국’을 들추는 몰상식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혐오하는 행동이다.

대한민국이 살아 있는 짐승의 창자를 파 먹는 야생의 하이에나는 아니지 않은가.

오늘 한국 언론의 모습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닌, 차별적 서사의 생산자였다. 이 사건은 언론 윤리 교육의 실패이자, 언론계 내부의 인권 감수성 결여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해당 보도에 대해 명확한 정정보도와 함께 공개 사과가 있어야 하며, 해당 언론사 내부적으로도 강도 높은 윤리 교육과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는 ‘차별의 자유’가 아니다.

만약 80년대처럼 기관원이 신문사 내부에 상주해 기사를 감독하는 쳬계가 복원된 것이라면, 더욱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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