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 독립’이 바꿔놓을 반도체 패권지도 – 중국 룽썬이 쏘아올린 신호

요약: 룽썬의 ISA 독립과 한국의 대응

이준엽 | 기술·산업 칼럼니스트 / 전략 기술 분석가 | 게시: 2025-06-27

2025년 여름, 중국의 반도체 기업 룽썬(Loongson Technology)이 공개한 새로운 범용 CPU 칩 ‘3C6000’은 단순한 신제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칩은 외산 기술이나 공급망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개발된 자체 명령어 집합 구조(ISA: Instruction Set Architecture)인 LoongArch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 말은 곧, CPU의 가장 핵심적인 설계 언어까지도 완전한 자립을 달성했다는 뜻이다.

ISA 독립, 왜 중요한가?

명령어 집합 구조(ISA)는 CPU가 소프트웨어와 소통하는 ‘언어’이자, 모든 하드웨어 설계의 기초다. 지금까지 세계 대부분의 CPU는 인텔(x86)이나 ARM 계열 ISA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두 회사는 ISA 사용에 대한 특허 라이선스를 통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따라서 ISA를 독립적으로 설계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반도체 칩을 하나 만들어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소프트웨어 생태계부터 운영체제, 드라이버, 개발 도구, 보안 시스템까지 전면적인 기술 자립을 의미하며, 이는 곧 ‘기술 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을 획득했다는 선언이다.

🇨🇳 중국의 전략적 대전환: 기술 봉쇄가 자립을 낳다

룽썬의 발표는 시진핑 정부의 ‘자립자강(自立自强)’ 전략의 결실 중 하나다. 미국이 주도한 반도체·AI 기술 봉쇄 정책은 중국에 강력한 외부 압력을 가했지만, 동시에 ‘외산 의존 체계’를 벗어나려는 동기와 속도를 배가시켰다. LoongArch 기반 3C6000 CPU는 인텔 3세대 제온 스케일러블 프로세서와 유사한 성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중국 내 정보보안 등 핵심 분야에 이미 적용되고 있다.

특히, LoongArch ISA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용 제어 칩, 모바일 칩, AI 프로세서가 동시에 출시되었다는 점은 단순한 반도체 기업의 성과가 아니라,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통합 생태계 구축의 첫 단계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중국이 자국 ISA 생태계를 통해 OS, 컴파일러, 응용 SW까지 전 영역에서 자체 표준을 형성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며, 나아가 국제 기술 질서의 다극화를 불러올 수 있다.

한국의 상황: 위기이자 기회

한국 기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기술·시장·정책이라는 삼중 압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단순한 위협이 아닌 새로운 산업 지형의 재편 기회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이제 LoongArch ISA를 기반으로 한 자체 생태계와 플랫폼을 본격 확장 중이다. 이 생태계는 독자적인 OS, 개발 도구, AI 프레임워크, 산업제어 시스템으로 이어지며 ARM이나 x86과는 다른 시장 영역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기업이 이 생태계에 전략적으로 참여한다면, 기존 미국 중심 기술 질서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중간자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반대로, 이 흐름을 외면한다면, 한국은 미국-중국 양쪽 블록 모두에서 점점 기술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다. 특히 CPU ISA가 독립될 경우, OS, 서버, 산업용 시스템에서의 호환성 기준도 달라진다. 한국이 지금처럼 x86과 ARM 기반에만 기술 투자를 집중한다면, 향후 중국형 ISA 생태계가 커질 때 동반 진입이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방향

ISA 독립은 단지 CPU의 설계 언어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 산업, 시장, 그리고 국가 안보를 재편하는 ‘코드의 독립선언’이다. 룽썬이 보여준 이 독립은 결국, 기술이 곧 주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국은 이 흐름 속에서 어떤 입장에 설 것인가. 그 선택의 시계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