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땅’이 낳은 아이러니
앞선 글에서 예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하나의 예멘'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예멘이 본래 여러 이질적인 구성체였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예멘은 왜 근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수많은 부족의 이해관계로 나뉘어 뿌리 깊은 분열을 겪게 된 것일까? 단순히 식민 지배나 이념의 차이만을 탓하기에는 예멘의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특성 자체가 이러한 분열을 구조적으로 강화해 온 역사가 존재한다.
중동의 '축복받은 땅', 그러나 분열의 씨앗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매우 독특한 자연 조건을 가졌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오만의 광활한 사막 지대와 달리, 예멘의 서부 고원 지대와 산악 지역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강수량과 비옥한 토양을 자랑하고 있다. 과거 시바 여왕의 제국이 세워졌던 데에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이러한 요소 덕분에 예멘은 고대부터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 즉 '행복의 아라비아'라 불리며 농업이 발달했다. 특히 15세기 이후 모카 커피(Mocha coffee)의 상업적 재배와 세계적인 유통이 시작되면서, 예멘 서부 지역은 커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모카 커피'는 단순히 모카 항을 거쳐 간 커피가 아니라, 예멘 땅에서 재배된 원두 자체의 독특하고 스파이시한 풍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값어치 있는 땅'과 그로부터 나오는 자원은 역설적으로 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비옥한 지역들이 국토 전반에 고르게 분포하지 않고 군데군데 흩어져 존재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자립적 공동체와 약한 중앙 정부의 필연적 결과
각각의 비옥한 지역은 인근의 부족들과 결속하여 독립적인 경제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이어졌다. 각 영역들은 커피 재배와 무역을 통해 스스로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이들 부족은 외부의 간섭이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도는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이권을 침해하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강력하고 통일된 중앙 정부의 개념이 자리 잡기 어려웠다. 서구적 의미의 국가가 성립하려면, 중앙 정부가 특정 지역에 몰린 자원을 국토에 골고루 배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개념이 성립돼야 하는데 예멘 지역에서는 이게 어려웠다.

우선 북쪽의 외부 세력인 사우디는 역사적으로 예멘을 침략한 적이 없다. 예멘과 사우디 사이에는 거대하고 거친 산악 지형이 자리 잡아 자연적인 경계가 됐기 때문이고, 동쪽의 오만은 오히려 예멘의 침략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즉, 외적의 침입이 없는 지역적 특성은 중앙 집권의 필요성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결국 오랜 세월 동안 각 지역이 자급자족하며 스스로의 영역을 굳건히 지켰고, 이는 중앙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는 부족장과 지역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시하는 사회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결국, 예멘인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모호하고 낯설었다. 서부의 입장에서 정부라는 개념은, 자신들의 자원을 가져가 척박한 동부 지역 등으로 재분배하는 '별 이익 없는'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투명성과 책임감이 부재한 공무 행정으로 이어졌고, 국제 사회가 보낸 원조품이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거나 특정 세력의 힘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됐다.
외부 개입과 심화된 분열
여기에 외부 세력의 개입은 이러한 내부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의 식민 지배는 북부와 남부를 서로 다른 행정 체제와 이념으로 묶어버렸고, 1990년의 통합 또한 서구의 '국가' 개념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산물이었지, 예멘 내부의 자생적인 통합 의지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었다. 현대에 와서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같은 역내 강대국들이 각 부족 및 종파 세력을 지원하면서, 예멘은 '하나의 국가'로서 통합되기는커녕 '다층적인 대리전의 장(場)'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정리
이처럼 예멘은 본래 '하나'가 아닌, 각기 다른 자원 기반과 전통을 가진 독립적인 부족 연합체였다. 이를 외면한 채 서구적 잣대로 억지로 통일을 강요하거나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것은, 오히려 내재된 갈등을 폭발시키는 불쏘시개가 될 뿐이다. 현 예멘의 비극을 풀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리적 특성이 빚어낸 독특한 사회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